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보코 하람 (문단 편집) == 역사 == 보코 하람의 태동은 나이지리아 국내사(史)상에선 논쟁거리다. 비단 국내가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여기 주목하는 이들은 많다. 일단 보코 하람과 유형을 같이하는 집단의 탄생 자체가 일정 이상 근현대화를 달성한 [[아랍]]권+[[아프리카]] 국가들간엔 보편적인 현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해당 국가 전체가 보코 하람과 같은 극악의 끝을 달리는 무장 조직, 테러 단체와 21세기까지 내전을 빚어오는지의 여부를 관찰하면 아프리카가 아닌 [[아라비아 반도]](AQAP), [[남아시아]]([[탈레반]])까지 범주를 확장해도 과반수는 그렇지 않다. 다시 말해 이 같은 역사적 굴곡이 나이지리아와 소수 국가의 특수한, 최소 보통은 아닌 사정임을 알게 된다. 보코 하람의 난이 거의 진압된 다음에도 초기 보코 하람을 비판하는 데 미온적이거나, 보코 하람에 동정적인 여론의 존재, 적어도 조기수습이 가능했던 평범한 갈등이 겉잡지 못하게 확대된 결과에 비탄하는 학계나 일각의 시선을 보면, 조직의 악마적 실체에 어울리지 않는 것이라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관찰에 주의할 부분은 창설 시기와 활동 개시 시점의 7년 간극이 있다는 점이고, 이 시간은 보코 하람에 무장 단체로 노선 변화가 야기되기까지의 사실상의 발전 기간. 그 기간이 7년이나 된다는 사실부터 보코 하람의 본질적 측면이 후기처럼 테러 단체의 요소를 포함했는지의 여부완 별개로 설립 시점, 목표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는 보코 하람의 탄생에 외부 요인의 존재, 나이지리아 정부의 귀책 사유를 의미한다. [[오사마 빈 라덴]]이 [[2001년]] [[9.11 테러]]로 달성한, 서방에 적대적이거나 이슬람 원리주의 세력의 시선으론 엄청난 위업일 성과에 고무돼 보코 하람은 자연 발생했다. 초기엔 지역 정당의 색채가 짙었다. 1994년부터 남서부 해안 기독교 우세 지역을 정치 기반으로 둔 집권 세력의 정책 전반(친서구, 남서부, 세속화, 현대화)의 반발기조를, 특히 서구화 교육의 반대 정신을 근간 삼고 이슬람 회귀주의적 기치를 내세웠는데 이는 후진국-개도국의 과도기 과정에 어느 나라건 누적되는 개발독재, 양극화, 지역 갈등, 도농 격차등 여러 이유로 발생하는 사회적 모순에 대한 불만 여론과 결합해 하층민,소외계층을 중심으로 해 [[반동(정치)|반동]]세력의 정치적 분출구가 되고 강력한 파괴력을 발휘했다고 한다. 보르노(+요베, 바우치, 카노) 주에서 순식간에 정치 세력화된 이 단체가 대번에 중앙정부의 시선을 안 끌기란 불가능했다. 한 번에 알 수 있듯 해안-내륙, 도농 격차, 세속-종교, 현대-전통 등 전형적인 대립 구도가 형성되자, 이 같은 현상이 북동부 분리주의 운동으로 비화될 걸 우려한 정부의 압박이 후속하고 몇 년 간의 정치, 물리적 긴장 관계가 지속된다. 2008년부터 그 긴장이 다른 양상으로 흐르기 시작하는데, 보코 하람 하부조직이 무장을 시도하고 있다는 진위가 불투명한 혐의가 추가되며 ''''2009년 보코 하람 폭동''''으로 갈등이 폭발한다. 해당 사태에 있어서 부수적 피해를 차치한다면 오랜 내전의 원인 제공자는 사태 발생의 단초를 제공하고 초동 대처에 실패한 치안군과 중앙 정부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2009년 보코 하람 폭동은 치안유지군이 도로교통법에 따라 [[https://www.theatlantic.com/international/archive/2014/05/the-bike-helmet-law-that-triggered-an-insurgency-in-nigeria/371301/|보코 하람의 재산을 압수]]하면서 시작됐다. 당시 유수프를 포함한 보코 하람 당원들은 장례식 도중이었고, 압수 재산은 공동묘지로 운구 중인 상여 행렬에 사용되던 오토바이 130여 대였다. 이 과정에 보코 하람측이 불복하며 17인의 사상자를 내고, 당원측은 보복으로 경찰을 습격해 상응하는 재산 피해가 발생했다. 이 폭동은 2009년 7월 26일~29일에 이르기까지 700여 명의 인명피해와 300명 가량의 부상자가 발생한 끝에 상기 보코 하람 지도자 무함마드 유수프의 처형으로 사태 종결됐다. 이는 중복 강조가 부족한 중요한 사건으로, 보코 하람 내전의 시작이자 나이지리아 현대사의 분기점이다. || [[파일:muhammdyusuf.jpg|width=100%]] || [[파일:bokoharammosque.jpg|width=100%]] || || Muhammad Yusuf 1970~2009 || 유수프 생전 강의하던 모스크의 잔해 || 유수프는 진압 과정상 사망이 아니라 체포됐는데, 폭동을 진압하는 건 물론이고 보코 하람 운동 자체를 종결 가능한 천재일우의 기회로 군측은 보았을 지 모른다. 그래서인지 유수프를 재판 없이 처형했다. [[https://www.bbc.com/news/world-africa-14136185|#]] 우두머리를 잃은 정치 세력의 자연 해체를 예상했겠지만, 이는 기념비적인 대응 실패로 기록된다. 보코 하람 세력의 중추 기반은 종교 시설이 겸하는 교육 기관으로, 공교육 혜택 밖에서 공립 교육을 대체하는 기능을 하던 느슨한 조직이 자금, 물자, 조직, 훈련을 외부로부터 이식받은 타 군벌, 무장 세력, 준 군사조직과 달리 비체계적이었다는 점이 특징이다. 민간에 융합돼 전통적으로 존재하던 조직은 리더가 제거돼서 해체될 뚜렷한 강령과 위계구조가 없었고, 이것은 보코 하람이 [[무자헤딘]], [[헤즈볼라]], [[탈레반]] 등 무장정파 대비 공교육 확대 과정에서 서구화된 세속주의 교육이 지역 기반 이슬람 전통 교육의 영역을 침범하는 데 반발하던 상당히 소심한 집단이었다는 사실에서 부각된다. 단체의 생성부터 소멸에 준하기까지 20년이 안 된 단체의 짧은 약력은 보코 하람의 초기 설립자들의 생존과 증언을 보장하고 있고 이들은 종교 기관, 교육 시설, 고아원 등 민완동계가 2002년 보코 하람으로 거듭나고, 다시 거기서 변질이 감지된 시기는 2005년부터였다고 술회하곤 한다. 신빙성을 담보할 순 없지만 이들은 초기 보코 하람 지도자들을 대상한 정부의 요인 암살도 증언하고 있다. 때문에 보코 하람의 주도권이 05년 이래 집단 내 과격파로 귀속된 상태에서 파벌의 실질 수장인 유수프의 처형은 타 창설자들이 즉각 손쓰기 어려운 권력 공백을 초래했고, 그런 공백을 차지한 자신들이 막지 못한 괴인이 [[아부바카르 셰카우]]였다는 진술이다. 나이지리아 정부도 10년 내전의 처참한 상흔 때문인지 자신들의 대응 실패를 부정하지 않는다. 2015년 이후 [[나이지리아]]-[[차드]]간 국경지대로 밀려난 보코 하람은 목적 있는 투쟁보단 생존을 위한 도적으로 변했고, 자신들이 자행한 [[전쟁범죄]]의 책임+처벌에 대한 공포가 활동의 원동력이 되고 있다고 대원들은 서구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밝히곤 한다. 이러한 사실을 의식해서인지 나이지리아 정부는 관용 정책으로 투항을 유도하고 있고, 이는 유효한 측면이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허나 이와 별개로 보코 하람은 외부 지원, [[마약]] 재배, 무장정파화와 같은 수단으로 존립 기반을 구축한 선배격 단체들과 달리 게릴라에 근접했다. 이렇듯 그 이념 전파와 모병창구, 조직 유지 중추가 되었던 [[낙후지역]]의 교육 시설이 민간과 밀접히 유착돼 있었던 것처럼 보코 하람의 난은 사실상 종식되었을지 모르나 보코 하람이 탄생했던 근간은 건재한다. 국제기관, 인권단체를 비롯한 서구 언론은 나이지리아 정부의 진압 과정상 무수히 발생하는 부수적 피해, 정확히 말하면 대규모 민간인 학살에 대해 비판을 반복하길 지속하고 있고, 여기 관해 나이지리아 정부나 학살 현장의 지역민들의 설명에서 보코 하람의 근간을 엿볼 수 있다. 학살 관련자를 취재하는 언론은 대개 주류라기보단 주류에 편입된 비주류에 가깝되, 그렇게 보도된 진압군과 자경단의 민간인 학살에 대한 입장은 일관성이 있다. 거기에는 그들만의 논리가 존재한다. 보코 하람 소탕의 주력은 나이지리아 정부군과 아프리카 연합군이되, 보코 하람 대원과 민간인을 판별할 여건이 출몰 지역 지역민이 아닌 이들에게는 갖춰져 있지 않다. 보코 하람 출몰 지역에서 이들의 보조 임무를 수행하는 세력이 분쟁 지역의 자경단으로, 이들의 역할은 보코 하람 대원을 은닉하는 대원의 가족, 보코 하람을 지원하는 옹호 세력을 단속하고 고발하는 것이다. 납치와 세뇌로 충원되는 부류 외에 보코 하람 대원의 상당수는 자진 입단이나 이념을 공유하는 친족들의 손에 반강제로 조직에 인도된 부류들로,[* 보코 하람이 원성을 사는 소녀 납치도 목적이 테러의 일환, 대정부 도발이나 [[인신매매]]라기보단 대원의 결혼이다.] 이러한 전투원들을 제외하고도 보코 하람의 조직원들과 조직외 지원 세력은 촌락 공동체와 지역 사회에 혼재 상태로 은닉해있던 실정이다. 보코 하람에 친지나 가족을 둔 지역민은 보코 하람에 적대적이기 어렵듯 이들은 보코 하람을 근절하지 못하는 주요 원인으로 작용했고, 이 점에서 게릴라는 '인민이란 물에서 헤엄치는 물고기'란 [[마오쩌둥]]의 변이 들어맞는 말이다. 학살 지역 지역민의 자경 활동과 정부군에 협조하는 이슬람 지식인은 보코 하람의 잔학상에 이탈한 민심의 방증이고[* 보코 하람의 이슬람 전통 사상에 동조, 자진 입단했더니 입단자들의 자질을 선별, 탈락시 불구로 만들고 버린다던가, 전투원들이 지역 기반을 반복적으로 노략질하면서 공포 통치를 구사하는 도적패로 전락했다든지.] 이들의 입장은 내전상 부수적인 민간인 피해는 수반이 자연스러운 불가피한 것이며 대개의 학살 희생자들은, 즉, 가족의 일원이 보코 하람에 가담해서 백안시, 경원시되던 지역 사회 구성원들보다도 한 발 더 나가 선을 넘어 보코 하람에 봉사했던 부역자들이라는 내용이 민간인 학살에 대한 해명. 그렇기 때문에 보코 하람의 동조, 지지, 비호, 가담 세력이 지역 사회로부터 구별해내기 난해할 뿐더러, 가능하더라도 처단이 어렵단 것이다. 이 같은 진술은 보코 하람의 근간을 드러내고 있다. 2019년 하반기에 이르러 나이지리아 군경은 보코 하람의 지역 기반 북서부 4개주를 중심, 종교 교육 기관 연쇄급습을 하루 걸러 단행하였다. [[https://www.google.com/search?q=nigeria+islamic+school+raid&tbm=nws&ei=OVLEXdS3ONGQr7wP5u-KsA4&start=10&sa=N&ved=0ahUKEwiUuLH9zdjlAhVRyIsBHea3AuYQ8tMDCF4&biw=1486&bih=768&dpr=1.25|#]], [[https://www.youtube.com/watch?v=lKS0AtW1Rw8|#]], [[https://www.youtube.com/watch?v=9yftEhuU9ho|#]], [[https://www.youtube.com/watch?v=aZ1u3kCJi3M|#]], [[https://www.youtube.com/watch?v=aZ1u3kCJi3M|#]] 이를 출구 전략으로 해석할 경우 10년 내전의 종식이 목전에 있다는 의미겠으나, 이슬람 성직자들에게 구금된 상태로 고문+세뇌 교육을 받던 건당 수백 명 단위 학생들은 또한 보코 하람이 왜 존재하고 유지될 수 있었으며, 중앙정부를 향한 살아있는 적개심은 향후의 가능성마저 죽었다고 할 수 없는 증거다. 2020년 6월 10일에 나이지리아 북동부에서 보코 하람 소속으로 보이는 무장대원들이 주민 69명을 살해했다.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2D&mid=shm&sid1=104&sid2=234&oid=001&aid=0011670126|#]] 7월 8일에 나이지리아 북동부의 마이두구리 시에서 보코 하람의 공격으로 군인 23명이 사망했다.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2D&mid=shm&sid1=104&sid2=234&oid=421&aid=0004743594|#]] 7월 13일에 보코 하람이 마이두구리 시 남서쪽에서 10km 떨어진 곳에서 군 호송차를 공격해 군인 10명이 사망했다.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2D&mid=shm&sid1=104&sid2=234&oid=421&aid=0004752651|#]] 2021년 8월 5일에 [[차드 호]] 인근에서 차드 군인 28명이 보코 하람에 의한 공격으로 사망했다. [[https://news.naver.com/main/read.naver?mode=LS2D&mid=shm&sid1=104&sid2=234&oid=003&aid=0010650475|#]]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